밀양박씨 12중조가 사용된 유래《나는 얼마나 알고 있나 》                                                                         자료제공: 인터넷 박씨문화원

1996년 4월에 발행한 밀성재(密城齋誌)의 91쪽에 전략…  우리 밀성박씨는 신라왕에서 근본하고 8대군이 탁평(啄評)을 나누어 다스림으로부터 성씨를 받아 본관을 달리했다. 우리 종족은 곧 밀성대군을 비조로 삼으니 신라(新羅)를 거치고 고려조(高麗朝)를 거쳐 조선(朝鮮)에  이르러서는 팔방에 만연(蔓延)히 동방의 대성(大姓)이되었다. 이문정공(이문정공)이 이르기를 『팔대군의 집안은 모두 후손이 있으나 밀성(밀양)이 더욱 들어났다』고 하니 진실로 그러하다. 라고 말한 것이 12중조란 말이 처음 문서에 기록된 것 같다.

  밀성박씨 12중조: 문헌의 처음 기록은  밀성 박씨세보(정유보 1741년 발행)에 대략 분파도를 그리고 그 옆에 이런말을 『 오른쪽 도표(계보)는 각파의 보첩을 근거로 하고 국담(菊潭)선조에 구록(舊錄:책)을 참고하여  배열은 오른쪽과 갈이하고 중조(中祖)가 선계를 일어버린 자는 이표를 인해서 세(世)를 잇고 기록이 없는 자는 이 도표를 근거로 해서 서차를 만들어 백세(百世)토록 종계(宗系)가 밝게 될 것이다. 비록 간혹 족보에 누락되어 소목이 원만하지는 못 하나 능히 한 근원임을 알 것이니 이것이 어찌 구양수(歐陽脩)가 족보를 만든 뜻이 아니겠는가?《右圖一依各派世牒參以菊潭先祖舊錄而分排如右中祖之失系者因此以紹世同派之未合錄者憑玆而序次百世宗系昭然於一圖之中離間或有逸譜缺而未圓不得畵序昭穆之列足以知同出於一源此豈非歐陽氏譜圖之意歟》』의 원문이다. 밀성재기에 도표에 있으나 글씨가 작아 보기 어렵고 밀성박씨 세보(1741년)보에 제세히 볼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정유보를 발간하면서 국담(菊潭)선생과   이문충공(李文忠公) 말 하기를… 라고 적혀있다.  그렇 다면 12중조란 말을  다른 문중의 보첩에서는 1741년 밀성박씨 세보를 베껴 쓰느데 만 신경을 쓴 것 같이 사료되며 바로 뒤에 발간된 「 밀양박씨 영조임술보(6권): 1742년」에는  밀양박씨12중조란 내용은 없다. (1741년 보첩을 참고할 것)

가. 국담(菊潭)은 박수춘(朴壽春)은  밀양박씨 태사공 후 행산공 후손 이다.

나.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중국 송나라의 정치가 이며 문인.이다.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등의 관직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고 송나라 초기의 미문조(美文調) 시문인 서곤체(西崑體)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서에는 《구양문충공집》등이 있다.